유럽의 교차로, 알자스의 역사
프랑스 동부, 보주 산맥과 흑림 사이에 놓인 평야 지대. 이곳이 알자스다. 일 강(Ill)과 라인 강(Rhin)이 흐르는 이 저지대는 오래전 광대한 습지였고, 선사시대 인류에게는 그리 우호적인 환경이 아니었다. 그 탓에 구석기와 신석기 유적은 많지 않다. 그러나 청동기 시대에 이르러 정착이 본격화되며 이 지역의 역사가 분명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켈트와 로마, 국경의 형성
기원전 5세기 무렵, 다뉴브 강 유역에서 이동해온 켈트족이 알자스 평야에 정착한다. 이들은 브리츠기베르크 오피둠(Britzgiberg)과 몽 생트 오딜의 이른바 ‘이교도의 성벽(Mur Païen)’ 같은 방어 시설을 남겼다. 이는 알자스가 이미 전략적 요충지였음을 보여준다.
이후 세쿼니족이 이 지역을 차지했으나, 부르고뉴의 에두이족에 위협을 받자 게르만계 수에비족, 즉 아리오비스투스의 군대를 불러들인다. 상황은 다시 변한다. 기원전 58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오크센펠트 전투에서 아리오비스투스를 격파하며 로마의 지배가 시작된다.
로마는 북쪽에 트리보크족, 남쪽에 라우라스크족을 정착시키고 라인 강을 따라 군사 주둔지를 세워 국경을 방어한다. 알자스는 로마 제국의 변경이자 방패가 된다.
게르만족의 이동과 프랑크 제국
166년 이후 반달족과 알라만족의 침입이 이어지며 지역은 큰 타격을 입는다. 352년에는 알라만족이 평야 전역을 점령한다. 이들은 오늘날 알자스 인구의 문화적 기반을 형성한 집단으로 평가된다.
메로빙거 왕조 시기에는 공국, 카롤링거 왕조 시기에는 백작령으로 편입되며 프랑크 제국의 일부가 된다. 그러나 843년 베르됭 조약으로 샤를마뉴 제국이 분열되면서 알자스는 로타르 1세에게 넘어간다. 이후 870년 메르센 조약에 따라 루이 독일왕의 통치권 아래 놓인다.
이로써 알자스는 신성 로마 제국의 일부가 된다.
도시의 황금기와 전쟁의 상흔
12세기, 알자스의 여러 도시는 봉건 영주로부터 자치를 확대하며 황금기를 맞는다. 황제의 보호 아래 ‘데카폴리스 동맹(Ligue de la Décapole)’이라는 10개 자유 도시 연합이 형성된다.
그러나 번영은 순탄치 않았다. 백년전쟁, 1349년 대흑사병, 빈번한 봉건 전쟁, 30년 전쟁이 지역을 휩쓴다. 알자스는 유럽 전쟁사의 중심을 통과한 땅이었다.
프랑스 왕국 편입과 변화
1648년 뮌스터 조약(Traité de Münster)으로 독일 황제는 상·하 알자스와 10개 제국 도시를 프랑스에 양도한다. 다만 스트라스부르(Strasbourg)는 제외됐다.
루이 14세는 네덜란드 전쟁 이후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 스트라스부르를 점령했고, 1678년 니메겐 조약(Traité de Nimègue)으로 병합이 확정된다. 이후 한 세기 동안 알자스는 비교적 안정과 번영을 누린다. 지역 특권도 상당 부분 유지됐다.
혁명과 제국, 그리고 산업화
1789년 프랑스 혁명은 알자스에서도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공포 정치와 종교 탄압은 지역 사회에 상처를 남긴다. 이 시기 뮐루즈(Mulhouse)가 1798년 프랑스에 편입되며 영토가 확장된다.
1801년 정교 협약(콩코르다, Concordat)은 종교적 갈등을 완화했다. 나폴레옹 전쟁 동안 알자스는 70명의 장군을 배출한다. 그러나 1814년 연합군 침공과 제2차 파리 조약으로 북부 일부를 상실한다.
19세기 중반, 알자스는 경제 발전에 주력하며 정치적 격변에서 한발 떨어진 모습을 보인다.
독일 제국과 두 차례의 세계대전
1870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패배 후 알자스는 독일 제국령이 된다. 강한 독일화 정책이 시행되지만, 산업은 독일과 프랑스 양측 시장을 기반으로 성장한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로 복귀한다. 그러나 프랑스어만 사용하는 행정 관료의 유입과 지역 고유법 폐지 시도는 자치 요구를 낳는다.
1940년 나치 독일이 알자스를 병합한다. 프랑스계 인사 추방, ‘마그레누(Malgré-nous)’라 불린 강제 징집, 슈트루트호프(Struthof) 강제수용소 설치 등 혹독한 통치를 겪는다. 1944년 콜마르 포위전과 아르덴 공세는 또 한 번의 피난을 불러왔다.
유럽의 중심으로
전쟁 이후 알자스는 폐허를 딛고 재건에 나선다. 독일과 스위스 국경에 인접한 위치는 경제적 장점이 된다. 1949년 5월 9일 스트라스부르에서 유럽평의회 첫 회의가 열리며 이 도시는 ‘유럽의 수도’로 자리매김한다.
오늘날 알자스는 프랑스에서 가장 작은 지역이지만 국내총생산은 상위권에 속한다. 실업률도 낮은 편이다. 자동차(푸조), 기계, 식품, 섬유, 제약 산업이 발달했고, 독일과 스위스로 출퇴근하는 국경 근로자도 많다. 포도 재배와 관광 역시 중요한 축이다.
여행자가 만나는 알자스
알자스는 단순한 국경 지역이 아니다. 켈트, 로마, 게르만, 프랑스의 층위가 겹겹이 쌓인 공간이다. 도시 간 거리가 짧고, 꽃으로 장식된 마을들이 이어진다. 스트라스부르 대성당, 와인 가도, 중세 마을들은 그 역사적 밀도를 일상 풍경 속에 품고 있다.
이 지역을 여행한다는 것은 프랑스와 독일, 그리고 유럽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형성됐는지를 체감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알자스는 경계에 놓인 땅이 아니라, 유럽을 이어온 길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