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는 언제나 지금처럼 통일된 나라가 아니었다. 각 지역마다 독자적인 역사와 전설을 간직하고 있으며, 알자스(Alsace) 지방도 그중 하나다. 이 지역을 대표하는 가장 상징적인 도시 중 하나가 바로 리크비르(Riquewihr)다.
리크비르, 시간을 거스르는 마을
리크비르는 오랭(Haut-Rhin) 주에 자리 잡고 있으며, 리슬링(Riesling), 피노 그리(Pinot Gris), 뮈스카(Muscat), 게뷔르츠트라미너(Gewurztraminer) 등의 포도밭으로 둘러싸여 있다. 여름이면 꽃으로 장식되고, 겨울이면 크리스마스 장식이 빛나는 이 마을은 중세의 정취를 간직한 채 여행자들을 맞이한다. 목재 틀을 그대로 유지한 집들과 아기자기한 발코니, 그리고 16세기 성곽과 성문이 여전히 남아 있어 마치 과거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준다.
리크비르의 역사, 알라만니족에서 프랑스 혁명까지
이 지역의 역사는 기원후 378년, 게르만계 부족인 알라만니족(Alamans)이 차지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5세기경에는 ‘리코(Richo)’라는 인물이 이곳을 소유했고, 그의 이름에서 ‘리크비르’라는 도시명이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메로빙거 왕국, 카롤링거 제국, 신성 로마 제국의 일부로 편입되었고, 1123년부터 호르부르크(Horbourg) 가문이 지배했다. 하지만 1324년, 후계자가 없었던 호르부르크 가문은 영지를 뷔르템베르크(Wurtemberg) 백작 울리히(Ulrich)에게 넘겼다.
17세기에 이르러, 유럽을 휩쓴 30년 전쟁(1618~1648)은 알자스 지역에 막대한 피해를 남겼다. 전쟁이 끝난 후 리크비르를 비롯한 알자스 일부가 프랑스 영토로 편입되었고, 종교적 박해를 피해 온 프로테스탄트들이 이곳으로 유입되었다. 그러나 이후 다시 신성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기도 했으며, 전쟁 후에는 스위스를 비롯한 라인강 유역에서 온 이주민들이 정착하게 되었다. 1796년, 프랑스 혁명 이후 리크비르는 최종적으로 프랑스에 병합되었고,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도 큰 피해를 입지 않아 오늘날까지 중세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라이헨슈타인 성과 백색 여인의 전설
리크비르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 해발 425미터의 언덕 위에는 라이헨슈타인(Reichenstein) 성이 자리하고 있다. 이 성은 1240년에서 1250년 사이 호르부르크 백작들에 의해 건설되었으며, 1255년부터는 라이헨슈타인 가문이 차지했다. 그러나 이 성은 단순한 중세 유적으로 남은 것이 아니라, 한 가지 전설을 품고 있다.
| 라이헨슈타인(Reichenstein) 성 |
전설의 시작은 1269년 한 여름 밤, 셀레스타(Sélestat)의 생트포이(Sainte-Foy) 교회에서 열린 결혼식에서 비롯된다. 축제가 끝난 후, 신랑 한스(Hans)와 신부 클라라 오브리스트(Clara Obrist)는 지참금을 가득 실은 마차를 타고 가족 및 하객들과 함께 콜마르(Colmar)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그러나 라이헨슈타인 성 근처를 지날 때, 성주였던 클라우스 기셀린(Klaus Giselin)과 그의 부하들이 이들을 습격했다. 가족들이 탄 마차는 간신히 도망쳤지만, 한스는 끝까지 저항하다 클라우스의 칼에 목숨을 잃었고, 클라라는 지참금과 함께 성으로 끌려갔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클라우스는 클라라를 유혹하려 했으나 거절당하자 그녀를 탑에 가두었다. 이를 알게 된 클라우스의 아내 게르다(Gerda)는 질투심에 사로잡혔고, 어느 날 밤 남편과 부하들이 여행객을 약탈하러 떠난 사이, 클라라를 칼로 찌른 후 탑에 가두었다. 그러나 범행 후 두려움에 사로잡힌 그녀는 근처 강으로 가서 피 묻은 손과 열쇠를 닦았다고 한다.
한스 오브리스트는 당시 콜마르 시의원의 아들이었고, 그의 죽음은 콜마르 시가 합스부르크 왕가의 루돌프 폰 합스부르크(Rudolf von Habsburg)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 루돌프는 군대를 이끌고 라이헨슈타인 성을 공격했고, 성은 화염에 휩싸였다. 게르다는 목숨을 잃었고, 기셀린 형제들과 그들의 부하들은 체포되어 교수형에 처해졌다.
사람들은 전설처럼 여전히 폐허가 된 성 주위를 거닐며 ‘백색 여인(La Dame Blanche)’의 환영을 보았다는 이야기를 전한다. 그녀는 하얀 옷을 입고 성의 탑 근처에서 걸어 다닌다고 하며, 밤이 깊어질수록 그 형체가 더욱 뚜렷해진다고 한다. 리크비르의 골목을 걸으며, 그리고 라이헨슈타인 성의 폐허를 바라보며, 우리는 이곳에 얽힌 수많은 이야기를 상상할 수밖에 없다. 역사와 전설이 얽혀 있는 알자스의 풍경은, 그 자체로 하나의 살아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