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빛의 요새, 아르겐토라툼 — 스트라스부르의 고대 이름

은빛의 요새, 아르겐토라툼 — 스트라스부르의 고대 이름

오늘의 스트라스부르는 유럽의회가 자리한 유럽연합의 수도 중 일부로서 상징적 도시다. 그러나 그 화려한 이름 아래에는, 2천 년 전 로마 제국의 국경 요새로서 존재했던 또 하나의 이름이 숨겨져 있다. 그 이름은 아르겐토라툼(Argentoratum, 라틴어 발음: 아르겐토라툼, 프랑스어 발음: 아르장토라툼). ‘은(Argento-)’과 ‘대지 위의 요새(rati-)’에서 유래한 이 라틴어 명칭은 문자 그대로 ‘은빛의 성채’를 뜻한다. 이름처럼, 이곳은 로마의 북부 경계를 비추는 군사적 등대였다.

스트라스부르 중심부에 있는 아르겐토라툼의 위치를 ​​보여주는 지도


켈트족의 정착지에서 로마의 전초기지로

이 지역의 최초 역사는 선사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신석기와 청동기, 철기 시대의 유물이 다수 출토된 점은 오래전부터 인간의 손길이 닿았음을 보여준다. 기원전 1300년 무렵, 프로토켈트족(protocelte)이 정착하며 아르겐토라테(Argentorate)라 불리는 작은 취락이 형성되었다. 이곳에는 성소와 시장이 있었고, 늪지를 메우는 대규모 토목이 이루어지면서 말뚝 위의 가옥은 단단한 대지 위의 건물로 바뀌었다.

기원전 58년, 로마군이 알자스(Alsace) 지역에 진입하면서 이야기는 새로운 전환점을 맞는다. 기원전 12년경, 장군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Nero Claudius Drusus)가 스트라스부르 일대의 켈트 마을 위에 군사 캠프를 세웠다. 그것이 바로 아르겐토라툼의 시작이었다.

율리아누스 시대의 로마제국의 라인강 국경.


제국의 변방, 그리고 성장의 도시

로마 제국의 행정 구역에서 아르겐토라툼은 '게르마니아 북부 지방(Provincia Germania Superior)'에 속했다. 처음엔 단순한 감시 거점이었지만, 점차 제국 북부의 주요 요새로 성장한다. 1세기 초에는 제2군단이 주둔했고, 90년대 이후엔 '제8군단 아우구스타(Augusta)'가 장기간 상주하며 본격적인 도시로 발전시켰다. 그들은 초기의 흙과 나무로 된 방벽을 헐고 석회암으로 된 성벽을 쌓았다.

2세기 무렵, 이곳은 군사 도시이자 교역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이 요새는 라인강(Rhin) 교역로를 지배하며 알자스산 와인과 헤일리겐베르크(Heiligenberg)의 토기 등을 수출했다. 항만은 현재 생토마 교회(Église Saint-Thomas) 주변에 있었으며, 수입된 암포라와 제조품들이 이곳을 통해 들어왔다. 그러나 도시의 본질은 끝내 군사였다. 모든 삶은 군단의 존재에 의존했다.

4세기 모습의 아르겐토라툼 모형


제국의 흔들림과 요새의 재편

3세기로 접어들며 로마 제국이 서서히 약화되자, 아르겐토라툼 역시 변방의 요새로 후퇴한다. 260년, 로마군이 게르마니아 일대를 철수하면서 도시는 국경 방어의 전초기지로 바뀌었다. 이 시기에는 요새 외곽에 장인과 상인들이 모여들어 부속 마을(비키와 카나베, vici et canabae)을 형성했는데, 오늘날 쾨니그스호펜(Koenigshoffen) 지역이 바로 그 자취를 품고 있다. 당시 인구는 2만 명에서 3만 명으로 추정되며, 이는 로마의 변방 도시로서는 매우 큰 규모였다.

아르토라툼(스트라스부르 고고학 박물관)에서 발견된 신석기 시대의 도자기.

4세기 초, 군사 인원은 줄고 민간 거주가 늘어나면서 요새는 도시로 변모했다. 그러나 평화는 길지 않았다. 355년 알라만족(Alamanni, 독일 민족)의 침입으로 도시가 초토화되고, 357년 로마 장군 율리아누스(Julianus)가 알라만족의 지도자 크노도마르(Chnodomar)를 격파하며 잠시 질서를 회복했다. 하지만 406년 게르만족의 대이동, 그리고 451년 훈족의 침입이 이어지며 도시는 완전히 파괴된다. 그 후에도 수백 명의 주민이 로마 성벽 안에서 삶을 이어갔고, 그들의 공동체는 훗날 중세 스트라스부르의 기원이 된다.

18세기 스트라스부르 지도에 나타난 로마 성벽의 윤곽


성벽과 거리, 오늘의 도시 안에 남은 로마

아르겐토라툼의 로마식 구조는 오늘날에도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요새는 일 면적 약 19헥타르, 사방이 일강(Îll)과 브뤼슈(Bruche) 강줄기에 둘러싸인 방형 평지에 세워졌다. 그 중심축은 현재의 스트라스부르 구시가 도로망과 정확히 맞물린다. 카르도(Cardō, 남북축)는 지금의 돔 거리(Rue du Dôme)에, 데쿠마누스(Decumanus, 동서축)는 알르바르 거리(Rue des Hallebardes)에 대응한다.

로마식 네 개의 문 — 포르타 프라에토리아(Porta Praetoria), 포르타 데쿠마나(Porta Decumana), 포르타 프린키팔리스 덱스트라(Porta Principalis Dextra), 포르타 프린키팔리스 신스트라(Porta Principalis Sinistra) — 는 지금의 도시 경계와 겹친다. 1970년대 발굴에서는 동문 구조가 확인되었고, 5.5미터 폭의 입구가 후기에는 3.2미터로 축소된 사실도 밝혀졌다.

1906년 발굴 당시

이 성벽은 세 차례에 걸쳐 확장되었다. 초기에는 흙과 목재로 된 방어선이었고, 2세기에는 석회암으로 다시 세워졌다. 3세기 후반에는 붉은 사암으로 된 제3성벽이 건설되며, 반원형의 망루와 둥근 코너 타워가 도시를 감쌌다. 이 성벽의 일부는 현재도 땅속에 남아 있으며, 템플뇌프 광장(Place du Temple-Neuf) 주변 건물의 지하에서 확인된다.

2008년 일대 건물 지하실


시간의 지층 위에 선 도시

로마 제국의 그림자는 451년 훈족의 침입과 함께 사라졌지만, 아르겐토라툼은 도시의 뼈대 속에 남았다. 그랑 일(Grande Île)의 좁은 골목길은 여전히 로마식 축선 위에 놓여 있고, 거리의 이름과 강의 흐름은 고대의 지형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오늘의 스트라스부르는 더 이상 요새가 아니다. 그러나 그 도심 아래에는 제국의 석벽, 미트라 신전의 조각, 군단의 비문이 잠들어 있다. 이곳은 유럽의 심장에서, 한때 세계의 변방이었던 시절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아르겐토라툼은 단지 고대의 이름이 아니다. 그것은 도시가 어떻게 시간의 층위를 따라 스스로를 재창조해왔는가를 보여주는, 스트라스부르의 가장 오래된 얼굴이다.

Caius Celsinius Matutinus의 이름이 새겨진 미트라교 비석


아르겐토라툼 입구 상상도


다음 이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