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점 만점 와인 평점, 정말 아직도 유효할까
"페트뤼스(Pétrus) 1983년이 89점"
"라피트 로칠드(Lafite Rothschild) 1983년이 88점"
"로마네 콩티(Romanée-Conti) 1982년이 88점"
위 와인들의 점수는 지금 기준으로 보면 쉽게 믿기 어려운 숫자들이다. 특히 이 이름들이 지닌 위상을 생각하면 더 그렇다. 혹시 비평가가 일부러 자극적인 평가를 한 건 아닐까, 아니면 당대 기준이 지금과는 전혀 달랐던 걸까.
이 점수들은 모두 한 사람에게서 나왔다. 바로 로버트 파커(Robert Parker)다. 오늘날 전 세계 와인 시장에 깊숙이 뿌리내린 ‘100점 만점 평가’를 대중화한 인물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남긴 과거의 점수들은 지금의 감각으로 보면 꽤 냉정하다.
| 로버트 파커(Robert Parker) |
파커의 점수는 왜 이렇게 낮아 보일까
파커의 평가가 유난히 박해 보이는 이유는 단순하다. 지금은 점수의 기준 자체가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이다. 미국식 평가 체계에서 70점은 ‘평균’을 뜻한다. 파커가 매긴 80점대 후반의 와인들은 당시 기준으로 충분히 좋은 평가였다. 심지어 67점을 받은 부르고뉴 그랑 크뤼, 아르망 루소(Armand Rousseau)의 샹베르탱 1983년 같은 사례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불과 40년이 채 지나지 않았지만, 오늘날 이런 점수는 거의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아무리 빈티지가 좋지 않아도, 유명 산지와 도메인의 와인이 80점 초반이나 70점대로 내려가는 일은 드물다.
와인이 더 좋아진 걸까, 점수가 달라진 걸까
와인 생산자들 사이에서 자주 들리는 말이 있다. “요즘처럼 와인이 잘 만들어진 시대는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양조 기술은 발전했고, 실패 확률도 낮아졌다. 하지만 그 이유만으로 과거의 빈티지들이 지금보다 더 낮은 점수를 받아야 할까. 1981년이나 1983년 보르도는 결코 위대한 해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최근의 ‘작은 빈티지’인 2013년, 2021년, 2024년보다 본질적으로 열등했다고 보기도 어렵다. 결국 답은 하나다. 와인이 달라진 게 아니라, 점수를 쓰는 방식이 달라졌다.
90점부터 시작되는 평점의 시대
로버트 파커가 비평 현장에서 물러난 이후, 국제 와인 평론은 점점 안전한 방향으로 이동했다. 지금의 평점 세계에서는 90점이 사실상의 출발선이다. 야심찬 와인은 95점을 넘어야 하고, 98점과 99점은 특별함의 상징처럼 쓰인다.
이런 점수 인플레이션은 두 가지 문제를 만든다.
첫째, 와인의 위계를 설명하지 못하게 된다.
95점과 98점 사이의 차이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워지고, 점수는 더 이상 선택의 기준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와인의 매력은 언제나 ‘차이’에서 시작됐다. 더 잘 만든 와인, 더 특별한 해, 더 높은 위치. 이 서열이 사라지면 와인의 서사도 함께 희미해진다.
둘째, 비평 자체의 힘이 약해진다.
예상 가능한 점수, 논쟁 없는 평가 앞에서 생산자와 애호가 모두 비평을 가볍게 소비하게 된다. 점수는 남지만, 해석과 판단은 사라진다.
숫자를 버릴 것인가, 되찾을 것인가
그렇다면 해답은 뭘까. 선택지는 크게 세 가지다.
하나는 숫자 평가를 내려놓는 것이다. 실제로 점수 없이도 향, 구조, 시간의 흐름을 언어로 풀어내며 충분한 설득력을 가진 비평은 존재한다.
또 하나는 완전히 새로운 평가 체계를 만드는 것이다. 과거 20점 만점에서 100점 만점으로 이동했던 것처럼, 또 다른 기준을 고민해볼 수도 있다.
마지막은 100점 만점 체계를 유지하되, 초창기의 정신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로버트 파커가 영향력을 가졌던 이유는 점수 체계 때문이 아니라, 그 점수를 두려움 없이 사용했기 때문이다. 낮은 점수도, 불편한 평가도 감수했던 자유로움이 그의 비평을 살아 있게 만들었다.
와인업계에서 관계자들이 스스로 던지는 질문은 결국 이것이다. '점수를 계속 쓸 것인가'가 아니라, '그 점수를 다시 용기 있게 쓸 수 있는가'다. 와인은 여전히 차이를 말하고 싶은 술이고, 비평은 그 차이를 언어로 드러내는 작업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