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병에 12억원, 1945년 로마네 꽁띠의 신화
와인 한 병의 가격이 10억을 넘어섰다. 1945년산 '도멘 드 라 로마네 꽁띠(Domaine de la Romanée-Conti)'가 2026년 3월 28일, 미국 경매사 'Acker'가 주관한 경매에서 81만 2,500달러(약 12억원)에 낙찰됐다. 기존 최고가였던 55만 8,000달러(약 8억원) 기록을 크게 넘어선 금액이다. 와인 경매사의 새 장이 열린 순간이다. 이 기록의 주인공은 부르고뉴의 상징과도 같은 '로마네 꽁띠 1945년 빈티지'다. 이미 2018년 소더비(Sotheby’s) 뉴욕 경매에서 같은 빈티지가 55만 8,000달러에 낙찰되며, 1869년산 '샤또 라피트 로칠드(Château Lafite Rothschild)'의 23만 3,000달러 기록을 넘어선 바 있다. 그때도 충분히 역사적이었지만, 이번 낙찰가는 그마저도 과거로 밀어냈다.
| 역사상 최고가 와인, 1945년 '로마네 꽁띠(Romanée-Conti)' |
1945년, 전쟁의 끝과 함께 태어난 전설
1945년은 부르고뉴 역사에서 특별한 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해이자, 기후 조건이 이례적으로 뛰어났던 해이기도 하다. 덥고 건조한 여름 덕분에 피노 누아(Pinot Noir)는 천천히 완숙했고, 그 결과 장기 숙성 잠재력이 탁월한 와인들이 탄생했다.
이 해가 더 상징적인 이유는 따로 있다. 로마네 꽁띠 포도밭의 고목들이 수확 직후 모두 뽑혔기 때문이다. 19세기에 심어진 이 포도나무들은 필록세라(phylloxera) 피해를 입지 않은 채 살아남은 존재였다. 이 나무에서 마지막으로 생산된 1945년산은 단 600병뿐이다. 역사적 의미와 희소성이 겹쳐지면서, 이 와인은 전설이 되었다.
‘프리 필록세라’라는 상징성
1945년산 로마네 꽁띠는 흔히 ‘프리 필록세라(Pre-phylloxera)’ 와인으로 언급된다. 19세기 후반 유럽 포도밭을 황폐화시킨 해충 필록세라에 저항성을 갖도록 접목되기 이전의 포도나무에서 나온 마지막 빈티지라는 의미다. 많은 전문가들은 이 시기 포도나무가 만들어내는 와인이 깊이와 복합미에서 독보적이라고 말한다. 과학적으로 모두 증명하기는 어렵지만, 상징성만으로도 수집가들의 심장을 충분히 자극한다.
경매 현장, 열기로 끓다
이번 판매는 세계 최대 규모의 부르고뉴 행사 ‘라 뽈레(La Paulée)’ 기간 중 진행됐다. 총 7,675병이 출품됐고, 예상 총낙찰가는 약 2,500만 달러에 달한다. 상위권은 대부분 DRC, 즉 '도멘 드 라 로마네 꽁띠'가 차지했다. '라 따슈(La Tâche)' 역시 강세를 보였고, '꼬쉬 뒤리(Coche-Dury)', '뒤로셰(Duroché)', '오베네(Auvenay)' 같은 생산자들도 존재감을 드러냈다.
애커 회장 존 케이픈(John Kapon)은 로마네 꽁띠 1945년산을 세 번 시음한 경험을 언급하며, 자신이 맛본 와인 중 단연 최고라고 평가했다. 과장이 섞였을지 몰라도, 그 감탄의 온도는 현장의 분위기를 설명하기에 충분하다. 부르고뉴를 포함한 최고급 와인의 시세는 전반적으로 안정세를 보이지만, 희귀 매물에 대한 열망은 여전히 뜨거웠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구매자는 투기 목적이 아닌 진정한 애호가에 가깝다고 밝혔다.
도멘 드 라 로마네 꽁띠, 왜 늘 중심에 서는가
'도멘 드 라 로마네 꽁띠'는 부르고뉴 '보느 로마네(Vosne-Romanée)'에 기반을 둔 땅이다. 드 빌렌(De Villaine) 가문과 르루아(Leroy) 가문이 공동 소유하고 있으며, 약 20헥타르의 포도밭을 여러 그랑 크뤼(Grands Crus)에 나눠 보유한다. 그중 로마네 꽁띠 구획은 2헥타르가 채 되지 않는다. 평균적으로 연간 5,000병에서 6,000병이 생산되지만, 1945년은 600병뿐이었다. 이 차이는 단순한 숫자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희소성과 역사, 그리고 브랜드의 위상이 한 점에 응축된 결과다.
경매 시장에서의 지배력도 뚜렷하다. 소더비 자료에 따르면 도멘 드 라 로마네 꽁띠는 낙찰가와 판매 비중 모두에서 최상위권을 차지한다. 최근 통계에서는 전체 와인 판매량의 17퍼센트를 차지하며, 7퍼센트의 페트뤼스(Pétrus)를 크게 앞섰다. 또한 1990년산 로마네 꽁띠 12병 세트가 홍콩에서 44만 9,890달러에 낙찰되며 단일 로트 최고가 기록을 세운 바 있다.
한 병의 가격, 그 이상의 의미
이번 81만 2,500달러 낙찰은 단순한 숫자 경쟁이 아니다. 전쟁의 종식, 사라진 고목, 프리 필록세라라는 상징, 그리고 전 세계 수집가들의 열망이 한 병에 응축된 결과다. 와인을 마신다는 행위는 결국 시간을 마시는 일이다. 1945년 로마네 꽁띠는 그 시간을 병 속에 봉인한 채, 다시 한번 세계 시장의 중심에 섰다. 그리고 그 코르크가 열리는 순간, 역사 역시 함께 숨을 쉰다.